19: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1 And when he drew near and saw the city, he wept over it,
19:42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42 saying, “Would that you, even you, had known on this day the things that make for peace! But now they are hidden from your eyes.
19:43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3 For the days will come upon you, when your enemies will set up a barricade around you and surround you and hem you in on every side
19: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으로 인함이라 하시니라
44 and tear you down to the ground, you and your children within you. And they will not leave one stone upon another in you, because you did not know the time of your visitation.”
19:45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45 And he entered the temple and began to drive out those who sold,
19:46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46 saying to them, “It is written, ‘My house shall be a house of prayer,’ but you have made it a den of robbers.”
19:47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47 And he was teaching daily in the temple. The chief priests and the scribes and the principal men of the people were seeking to destroy him,
19:48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였더라
48 but they did not find anything they could do, for all the people were hanging on his words.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3차 협상이 마무리 되었지만 뚜렷한 진전은 없어 보입니다.
예상보다 강력한 우크라이나의 저항과 여기에 전세계에서 2만 여명의 국제용병들이 합류하여 힘을 보태는 바람에 오히려 우크라이나의 사기가 올라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가짜사나이 라는 군 예능 프로그램으로 유명해진 미군출신의 한국군인이었던 이근 대위가 우크라이나에 합류했다는 소식이 있습니다.
전세계가 하나가 되어 우크라이나를 위해 여러 방면에서 돕는 모습은 아직도 인종을 떠나 인류의 마음에 선악을 구별할 수 있는 기능이 살아있다는 점에서 기쁨을 줍니다.
하지만 교전으로 말미암아 도시가 파괴되고, 군인과 민간인들의 시체가 거리에 방치되어 있는 모습과 가족이 생이별을 하며 우는 모습은 여전히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얼마 전 한 아이의 엄마가 자신은 노모를 돌보아야 해서 피난길에 오를 수 없어, 11살 된 아들만 혼자 수백 마일 떨어진 곳으로 피난을 보냈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아들을 홀로 보내면서 SNS를 통해서 그 아들을 도와달라고 울부짖는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전쟁이란 이런 것인가 봅니다. 눈물을, 아니 피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는….
우시는 예수님 (41~44절)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에 가까이 오시자 그 성을 바라보며 우십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가운데 우신 일은 3번입니다. 먼저는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요 11:35) 라는 기록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우십니다. 마지막으로 복음서에 직접 기록된 것은 아니지만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심히 통곡하시며 기도했다고 기록합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히 5:7)
이러한 예수님의 눈물은 메시아로서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인성을 잘 드러내주는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예루살렘 성을 보며 눈물을 흘리셨을까요?
본문을 살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마을 또는 평화의 땅이라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눈에 보이는 예루살렘의 미래는 결코 평화가 아닌 참혹한 전쟁이었습니다. 얼마든지 그들은 그 이름처럼 평화를 쟁취할 수 있었습니다. 눈 앞에 나타난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며칠 뒤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것입니다. 그들의 죄값은 너무 큽니다.
그러므로 날이 이르러 하나님의 심판의 때가 되면 로마의 디도Titus 장군이 예루살렘 주위에 토성을 쌓아 성을 넘어 그들을 점령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백성과 자녀들은 아주 참혹하게 살해를 당하고, 결코 패배하지 않을 것이라는 시온성, 곧 예루살렘 성과 심지어 성전까지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무너질 것입니다.
이 미래를 보시는 예수님은 사랑하는 장자인 이스라엘이 받을 고난 때문에 괴로워 우시는 것입니다.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우신 것보다, 훨씬 강력한 애곡의 눈물입니다. 톰 라이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다. 그 동안 선포 되었고 이제 곧 시행될 가공할 심판은
엄격하고 차가운 정의가 아니라 사랑의 마음에서 흘러 나온다. 이 눈물은 단지 슬프고 안타까운
상황에 대한 인간적 반응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눈물은 사랑의 하나님이 흘리시는 눈물이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이 눈물은 아무리 돌이키게 하려 해도 말을 듣지 않아, 이제는 망할 수 밖에 없는 사랑하는 예루살렘을 보시며 안타까워 흘리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눈물이었던 것입니다.
성전청결 사건 (45~48절)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셔서 먼저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 쫓으시고, 그곳에서 말씀을 가르치십니다. 예수께서 성전을 청결케 한 것은 사역 초기(요 2:13~22)와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역 말기(마 21:12~17; 막 11:15~19)로 두 번입니다.
당시 성전에는 성전세를 내도록 성전세겔로 돈을 바꿔주는 자들과 제사용 제물인 짐승들을 파는 자들이 성전 마당까지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성전은 짐승의 오물 냄새와 울음 소리로 가득했습니다.
대제사장이나 서기관들은 이들에게 뇌물을 받고 그들이 마음대로 활개를 치도록 편의를 봐준 것입니다.
원래 제물은 제사하는 자가 정성 들여 일년 동안 흠 없이 키운 것으로 드려야 합니다.
하지만 제물을 가져오기도 힘들고, 가져와도 제물의 합격 여부를 검사 하는 자들이 장사꾼들의 뇌물을 받아, 성도들이 가져온 제물을 불합격 처리하고 성전에서 파는 짐승들을 사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아예 사람들은 그냥 돈을 가지고 와서 제물을 사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자신의 인격과 전혀 상관없는 제물을 드리게 된 것입니다. 더 편해진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이스라엘의 타락이었습니다. 희생제도의 비인격화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사 56:7b)라는 이사야의 말씀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7:11)라는 말씀을 인용하여 그들을 질타하고 내 쫓은 것입니다.
이제 다시 하나님의 집은 본래의 기능을 회복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기뻐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잠시일 뿐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의 권위와 기득권을 모두 빼앗아간 예수라는 청년을 죽일 것입니다. 이제 영원히 성전의 기능은 회복할 수 없이 파괴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있어서 편의성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배 본래의 의미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곧 본질을 찾고 구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산제사는 우리 자신을 전인격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형식적인 예배 참석, 찬양, 기도가 아닌 매 예배 때 마다 내 자신을 제물로 잡아 드려야 하는데, 그럴 수 없기에 나를 위해 대신 죽으신 예수를 의지하여 나가는 것입니다.
나를 제물로 드리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의지하여 예배할 때 우리의 예배는 산 제사가 되는 것입니다.
더 이상 나로 인하여 예수님 눈에 눈물 흐르는 일이 없으면 좋겠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기쁨이 되고, 주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는 성도요 교회 되기를 꿈꿔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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